미술치료 · No. 03
“잘 그릴 필요 없어요”라는 말의 실제 의미
이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작업 조건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 글
- 한도연
- 발행
- 2026-06-12
- 분량
- 4분
- 재료
- 점토
점토 · 손의 온도만큼 형태가 된다
첫 회기에 우리가 반드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잘 그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분이 이 말을 예의로 받아들입니다. 못 그려도 괜찮다는 배려, 부담을 덜어 주려는 인사말 정도로요. 그러나 이것은 배려가 아니라 작업 조건의 선언입니다.
미술치료에서 완성도는 자료가 아닙니다.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에서 우리가 읽어 내는 정보의 양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손이 익숙한 분들의 작업이 해석하기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훈련된 손은 감정보다 습관을 먼저 따르기 때문입니다. 미술을 전공한 내담자와 작업할 때 우리는 종종 왼손으로 그리게 하거나, 눈을 감고 시작하게 합니다.
그래도 잘 그리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
그럼에도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라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 마음 자체가 다뤄야 할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보여 줄 것도 아닌 그림 앞에서도 평가받는 기분이 든다면, 그 감각이 어디에서 왔는지가 그 회기의 주제가 됩니다. 실제로 “선생님이 이걸 어떻게 볼까 신경 쓰였어요”라는 문장에서 시작해 부모와의 관계로 이어진 회기가 여럿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여 줄 것도 아닌 그림 앞에서 평가받는 기분이 든다면, 그 감각이 그날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업물을 벽에 걸지 않습니다. 스튜디오 어디에도 내담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잘된 작업을 골라 걸어 두는 순간, 그 벽은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모든 작업물은 촬영한 뒤 개인 아카이브에 보관하고, 종결할 때 본인에게만 전달합니다.
덧붙이면, 완성하지 않아도 됩니다. 중단된 그림, 절반만 만든 형태, 끝내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빈 종이 모두 그 자체로 기록입니다. 빈 종이를 그대로 보관해 두었다가 4회기 뒤에 다시 꺼낸 적이 있습니다. 그 종이를 보고 내담자가 한 말이 그날 회기의 전부였습니다.
글 한도연 · 여백 YEOBA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