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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 No. 02

지우개가 남기는 흰 획

목탄으로 애도를 다루는 이유. 지운 자리는 결코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글
한도연
발행
2026-05-26
분량
5분
재료
목탄

목탄 · 지우면 자국이 남는다

목탄 위에 지우개를 대면 검정이 사라지는 대신 흰 획이 그어집니다. 종이의 결 사이에 들어간 가루는 완전히 빠지지 않고, 지운 자리는 주변보다 미세하게 눌려 광이 납니다. 정면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종이를 기울이면 분명히 보입니다. 지운 흔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상실을 다루는 회기에서 이 재료를 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애도의 어려움 중 하나는 주변에서 은연중에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기대한다는 점입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예전처럼 웃고, 예전처럼 일하고, 예전처럼 잠들 것이라는 기대. 그러나 상실을 겪은 사람의 목표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갈 원래가 이미 없습니다.

덮는 것과 지우는 것

6회기 프로그램의 중반은 이 구분에 씁니다. 목탄으로 그린 형태를 지우개로 밀어 보고, 다른 종이에는 같은 형태를 검정으로 덮어 봅니다. 두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덮은 쪽은 아래가 보이지 않지만 표면이 무겁고, 지운 쪽은 아래가 비쳐 보이지만 표면이 가볍습니다. 어느 쪽이 지금 자신의 상태에 가까운지를 고르는 것이 그 회기의 질문입니다.

돌아갈 원래가 없다는 사실을 재료로 먼저 겪으면, 그 이야기를 말로 하는 일이 조금 덜 어려워집니다.

말로 먼저 하는 방식과 순서를 바꾸는 것이 미술치료의 핵심입니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장을 상담자가 먼저 꺼내면, 그것은 대체로 요구로 들립니다. 그러나 지운 자리에 남은 광을 손끝으로 만져 본 뒤에는 같은 이야기가 발견처럼 도착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발견이 일어날 조건을 만들어 두고 기다리는 것에 가깝습니다.

마지막 두 회기에는 지운 자국 위에 다시 그립니다. 새로 그린 선은 반드시 아래 자국의 영향을 받습니다. 눌린 자리에는 가루가 덜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결함으로 볼지 재료로 볼지는, 그 시점에는 이미 내담자가 정합니다.

글 한도연 · 여백 YEOBA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