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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Yeobaek
저널

색채 · No. 05

색에는 사전이 없습니다

검은색은 우울이고 빨강은 분노라는 해석표가 왜 임상에서 폐기되었는지, 그리고 그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는지.

글
한도연
발행
2026-07-14
분량
5분
재료
수채

수채 · 번지는 것을 그대로 둔다

“검은색을 많이 쓰면 우울한 건가요?” 상담실에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인터넷에는 색채 심리라는 이름의 해석표가 넘쳐 나고, 그중 상당수는 색과 감정을 일대일로 대응시킵니다. 빨강은 분노, 파랑은 슬픔, 노랑은 불안. 임상에서 이 표는 쓰이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폐기되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같은 검은색이 누구에게는 애도이고 누구에게는 안도이기 때문입니다. 한 내담자는 상실을 겪은 뒤 여섯 회기 동안 검정만 썼습니다. 종결 무렵 그분이 남긴 말은 이랬습니다. “다른 색을 쓰면 그 사람이 정말 없어지는 것 같아서요.” 또 다른 분은 불안이 심한 시기에 검정을 집어 들었는데, 이유는 정반대였습니다. “색을 고르는 것 자체가 결정이잖아요. 검정은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색이라서요.”

무엇을 보는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색 자체가 아니라 색을 둘러싼 행동을 봅니다. 색을 고르는 데 걸린 시간, 고르기 전에 손이 어디에서 멈췄는지, 한 번 고른 색을 바꾸는지 끝까지 밀고 가는지. 팔레트를 다 쓰는 사람과 두 가지만 쓰는 사람의 차이는 색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의미는 내담자가 스스로 붙일 때에만 유효합니다. 치료자가 먼저 붙인 의미는 대체로 치료자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른 변화입니다. 한 장의 그림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그러나 여덟 장을 나란히 놓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3회기까지 종이의 왼쪽 아래에만 그리던 사람이 6회기에 처음 가운데를 쓰기 시작하는 것 같은 변화는, 본인도 지적받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모든 작업물을 촬영해 보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색채 해석표가 완전히 무용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가설의 목록이지 결론의 목록이 아닙니다. 검은색을 보고 우울을 떠올리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것을 내담자에게 말하기 전에 최소한 세 번은 다르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 임상의 규칙일 뿐입니다.

글 한도연 · 여백 YEOBAEK